120907 서울의 사대문 사소문 오대궁

2022. 12. 5. 14:24아름다운세상

서울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사대문(四大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
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췄다.


사소문(四小門)
1. 혜화문(惠化門)-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
2. 광희문(光熙門)-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보내는 문이라하여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한다
3. 소의문(昭義門)-소덕문(小德門)이라고도 한다
4.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서울의 사대문(四大門), 사소문(四小門), 오대궁(五大宮) 및 성곽()

 

● 사대문(四大門)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사대문은 유교사상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 근거를 두고 명명됐다.

 

동쪽문은 인을 일으키는 문이라 하여 흥인문(興仁門), 서쪽문은 의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 하여 돈의문(敦義門), 남쪽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 하여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

 

그러나 북쪽문은 지형이 험하고 사실상 사람의 왕래가 없어선지 숙지문(肅智門)이라 하지 않고 청()자를 넣어서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사소문(四小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의 4대문 사이에 나 있던 소문(小門).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동북쪽에 홍화문(門: ), 동남쪽에 광희문(門:), 서남쪽에 소덕문(門: 西), 서북쪽에 창의문()을 세웠다.

 

그 중 동소문은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을 건축하고 그 동문을 홍화문()이라 하였으며 1511년(중종 6)에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그 뒤 1816년(순조 16)에는 중수()하고 1869년(고종 6)에 보수하였으며, 1928년에는 문루를 헐고 석문만 남겨 두었는데 그 후 전차를 부설하면서 석문마저 철거하여 지금은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수구문()은 1711년(숙종 37) 새로이 석문만 건축하고 9년 후인 1720년에는 문루를 지어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1975년 도성복원() 공사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광희문 이외에 1457년(세조 3) 지금의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따로 남소문을 축조하였으나 1469년(예종 1)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폐쇄되었다.

 

서소문은 1738년(영조 14)에 석문을 개축하고 1744년 문루를 건축한 뒤 소의문()으로 개칭하였으나 1914년 도시계획 때 철거되었다.

 

창의문()은 1413년(태종 13)에 폐쇄되었으나, 1741년(영조 17) 성문을 다시 고쳐 짓고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걸게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사대문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보물 제1호
서대문:돈의문(敦義門)
남대문:숭례문(崇禮門):국보 제1호
북대문:숙정문(肅靖門):사적 제10호
사소문 동북쪽:혜화문(惠化門:)
동남쪽:광희문(
:)
서남쪽:소의문(昭義門:
西))
서북쪽:창의문(
門:)
오대궁 경복궁(景福宮):사적 제117호 / 정문 광화문()
창덕궁(昌德宮):사적 제122호 / 정문 돈화문(敦化門):보물 제383호
창경궁(昌慶宮):사적 제123호 / 정문 홍화문(弘化門):보물 제384호
덕수궁(德壽宮):사적 제124호 / 정문 대한문(
) 
경희궁(慶熙宮):사적 제271호 / 정문 흥화문(興化門):서울시유형문화재 제19호

 

● 오대궁(五大宮)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은 1395년(태조 4)에 완성된 경복궁(북궐)이고, 그 다음 1405년(태종 5)에 창덕궁(동궐)이,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이 차례로 세웠졌습니다. 그 후 1620년 광해군 때 경희궁(서궐)이 창건되고, 경운궁(후의 덕수궁)을 왕궁으로 사용하였기에 이를 합쳐 오대궁이라고 한다.

 

 

* 수선전도(:1840년 김정호 제작) 상에 표시한 사대문(四大門), 사소문(四小門) 및 궁궐(宮闕)

 

* 풍수지리설에 따라 해석한 수선전도() 상의 종묘·사직과 오대궁의 위치

 

 

* 현재 사용되는 지도 상에 사대문(四大門), 사소문(四小門) 및 성곽()을 표시하여 본 것임.

 

 

사대문(四大門)

 

1. 동대문(東大門)

정식명칭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서울 4대문중 하나로 보물 제1호이다.

 

서울의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동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둘러 축조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갖추고 있다.

 

2. 서대문(西大門)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정식 명칭은 돈의문(敦義門)이고, 서대문(西)·새문·신문()이라고도 한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동 신문로 2가에 있었던 조선시대 성문. 사진으로만 전한다.

 

1396년(태조 5) 한양 도성()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태종 13)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을 새로 지어 출입케 하였다가, 1422년(세종 4)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되고 말았다.

 

대략적인 모습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집의 초루()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3. 남대문(南大門)

정식 명칭은 숭례문()이고,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에 있는 도성의 남쪽 정문으로 1962.12.20일자로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이라고 불린다.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
)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
)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머리[],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기할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
)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4. 북대문(北大門)

종로구 삼청동(三淸洞)의 북악산(北岳山)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북대문은 남대문·동대문·서대문과 함께 서울성곽 4대문의 하나. 사적 제10호로, 정식 명칭은 숙정문(肅靖門)이다.

 

이 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다. 

이후 연산군 10년(1504)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 자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궁문, 성문, 지방관청의 바깥문 등의 위에 지은 건물)는 세우지 않은 듯하다. 

원래 명칭은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초의 기록을 보면 풍수설과 음양설에 따라 숙정문을 닫아 두었거나 열어 놓기도 하였다. 그 예로 태종 13년(1413) 6월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地脈)을 손상시킨다는 상서(上書)가 있자, 마침내 이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 후 태종 16년(1416)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하였다. 이는 북은 음()이요, 남은 양()인 까닭에 가물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 지므로 항상 문을 닫아 두게 되었다고 소개하였다. 

현재의 북대문은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석문만 있었느냐 아니면 문루도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차례 토론을 거쳐, 태조 때 문루가 건축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를 복원한 뒤 '숙정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사소문(四小門)

 

① 혜화문(惠化門)

1397년(태조 5)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쌓을 때 도성의 북동방에 설치한 문()으로, 동소문()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② 광희문(光熙門)

중구 광희동(光熙洞)에 있는 조선의 사소문(四小門)으로 시구문() ·수구문()이라고도 하였다.

 

서소문(西)과 함께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다.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의 건의로 금위영()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③ 소의문(昭義門)

서소문(西)이라도 한다. 지금은 소덕문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중구 서소문동 58-10번지. 중앙일보사옥 주차장별관 화단)으로 그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다.

 

1396년(태조 5)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지으면서 소덕문()이라 하였다가 1744년(영조 20) 문루()를 세우면서 이 이름으로 고쳤다.

 

1472년(성종 3) 예종()의 비()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라 하면서 이 이름을 피해 소의문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서소문동 큰길에 있던 서남간문(西)으로, 일반적인 통행로이면서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통로 구실을 하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성곽과 함께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전해지는데, 그에 따르면 성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 하나를 내어 통로로 삼았으며, 석축 위 4면에 나지막한 벽돌담을 두르고 양옆에 출입문을 세워 문루로 드나들게 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 용마루에는 용두(), 내림마루에는 여러 상()을 각각 장식하였다.

 

④ 창의문(彰義門)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문()으로, 북문() 또는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의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오대궁(五大宮)

 

(1) 경복궁(景福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로, 그 면적은 34만 3888.1㎡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광화문() / 경복궁(景福宮)의 정문(正門)


현재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되기 이전의 광화문은 석축기단()에 3궐()의 홍예()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두공()은 다포식()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내삼출목(),
외부는  제공()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을 만들었으며, 첨차()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되었다. 당초 1395년(태조 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이전시켰고, 그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390여 동),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한 경복궁은 33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 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이다.

 

경복궁창건

 

태조  1년 (1392) 조선개국
태조  3년 (1394)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태조  4년 (1395) 종묘·사직 그리고 경복궁 창건
태조  5년 (1396) 경복궁 궁성 축조

 

법궁 체제 확립

 

태종12년 (1412) 경회루를 고쳐 지음
세종  9년 (1427) 동궁 자선당 건립
세종11년 (1429) 사정전과 경회루 다시 지음
세종13년 (1431) 광화문을 고쳐 지음
세종14년 (1432) 문소전을 새로 지음
세종15년 (1433) 신무문 새로 지음. 강녕전 고쳐 지음
세종16년 (1434) 광화문에 새 종 설치. 보루각 새로 지음(자격루 설치). 융문루·융무루 수리
세종20년 (1438) 흠경각 새로 지음(옥루기륜 설치)
세종25년 (1443) 계조당·교태전 새로 지음
세조  2년 (1456) 취로정 새로 지음
성종  5년 (1474) 근정전에 청기와 올림

 

화재 및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소실

 

중종38년 (1543) 동궁 화재로 인해 소실
명종  8년 (1553) 화재로 인해 강녕전·사정전·흠경각 등 소실
선조25년 (1592)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소실

 

대원군의 중건과 화재

 

고종  2년 (1865) 경복궁 중건 시작
고종  4년 (1867) 경복궁 중건 완료. 근정전에서 조하 의식 거행
고종  5년 (1868)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
고종10년 (1873) 경복궁에 건천궁 새로 지음
고종13년 (1876) 화재로 인해 830여칸 건물 소실
고종25년 (1888) 강녕전·교태전·자경전 등 다시 지음

 

민족 수난기와 경복궁 복원

 

1915년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조선총독부 박물관 건물 중공
1918년 강녕전·교태전 등 내전 전각 훼철
1927년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 광화문 이건
1954년 경복궁 일반 공개
1968년 광화문 복원
1975년 영추문 복원 및 동정문 건립
1994년 강녕전·교태전 일곽 복원
1995년 흠경각 복원. 구 조선총독부 박물관 건물 철거
1997년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1999년 동궁 복원(자선당·비현각)

 

경복궁 복원

 

2001년 흥례문·유화문·명제교 복원
2003년 근정전 귀고주 교체 및 지붕 전면 보수
2005년 경회루 동편 담장 복원, 태원전 일곽 복원
2006년 건천궁 일곽 복원
2007년 한화당·집경당 보수 및 주변 행각 복원 중(~2008년까지). 광화문 일곽 복원 중(~2009년까지)

 

(2) 창덕궁(昌德宮)

종로구 와룡동(臥龍洞) 2-7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로, 그 면적은 43만 4877㎡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돈화문(敦化門) / 창덕궁의 정문. 보물 제383호


조선 선조() 때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집이다. 중앙의 3칸은 가운데 주열()에 각각 2짝씩 문짝을 달았으나 좌우 맨 끝의 칸과 측면 앞의 절반은 모두 벽을 쳐서 막았다. 위층은 누마루를 깔고, 4면에 작은 판문()을 돌려 달았으며, 고주()는 좌우 2개만 있고 가운데는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다른 문루건축()은 고주를 가운데에 한 줄로 배치하는 일이 보통이지만, 이 돈화문은 그 일부를 생략하여 넓은 공간을 활용하도록 새로운 의도를 나타내었다.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삼출목() ·외이출목()의 다포집 계통의 것으로 쇠서[]들의 형태는 아직도 건실한 기풍을 지녔다. 그러나 내부의 살미첨차들은 이미 적지 않게 장식적 요소가 나타나 변형되었다. 한때 돈화문은 창경궁()의 명정전(殿)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병화()를 면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이라 생각되어 왔으나,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건물임이 밝혀졌고 돈화문도 그 세부적인 수법을 서로 비교해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건축임이 분명하다.

 

태종()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1405년(태종 5)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殿)·선정전(殿)·소덕전(殿)·빈경당()·여일전(殿)·정월전(殿)·옥화당()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3) 창경궁(昌慶宮)

종로구 와룡동(臥龍洞) 2-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로, 그 면적은 약21만8000㎡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홍화문(弘化門) / 창경궁의 정문. 보물 제384호


우진각지붕집.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중층 문루.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조선 성종 때 영건된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殿)이 동향()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 문도 동향이다.


하층은 주간()마다 모두 가운데 주열()에 두 짝씩 문비()를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현재는 초석이 도로면과 같은 높이에 있으나 원래는 장대석으로 쌓은 낮은 기단이 있었다.


천장은 지붕 밑이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종량()이 없고 대량()만 한 가운데를 아래층에서부터 통으로 세워진 고주()에 의해 받쳐져 있다.

 

1484년(성종 15) 당시 생존하였던 세 왕후(세조·덕종·예종)의 거처를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지은 것이다. 이때 지은 집이 명정전·문정전·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과 양화당·여휘당 및 사성각 등이다.

 

전각의 이름은 서거정()이, 정전(殿)인 명정전의 상량문은 김종직()이 지었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고 나서도 몇 차례의 화재가 있어, 그때마다 내전이 불탔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명정전을 비롯한 그 회랑과 그 앞문인 명정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등 외전과, 1834년(순조 34) 다시 지은 숭문당·함인전·환경전·경춘전·통명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 등의 내전으로 나눌 수 있다.

 

궁의 배치를 보면, 동쪽 한가운데에 ‘’자 모양으로 불룩하게 나온 중심부분에 있는 중층삼간누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 위에 놓인 옥천교가 있고, 이를 건너면 명정문과 좌우 행랑채가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널찍한 뜰이 나오고, 그 일직선상의 중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명정전이 있다. 홍화문 좌우의 행랑이 이 명정전까지 계속되면서 울타리를 이루어, 창경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명정문은 홍화문보다 높은 지대에 있고, 명정전은 명정문보다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는데, 이러한 예는 창덕궁과 개성()의 만월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었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으며,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뒤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하여 도로를 설치하였으며, 궁 안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을 수천 그루나 심어놓고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시설로 이용되다가 1980년대에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워 1983년 7월 1일부터 복원공사를 위하여 일반공개를 중단하였고, 그해 12월 30일에는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1984년부터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문정전 등을 복원하였으며, 벚꽃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고 한국 전통의 원림()을 조성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4) 덕수궁(德壽宮)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로, 그 면적은 6만 3069㎡이다. 1962년 7월 25일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문() / 정동에 있는 덕수궁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원래 정전(殿)인 덕수궁 중화전(殿)의 정면에
있었던 것을 나중에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을 옛이름인 경운궁()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6년 4월에 그 정문인 대안문()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쳤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각마루에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이 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德壽宮)이라 하였다.

 

(5) 경희궁(慶熙宮)

종로구 신문로(新門路) 2가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궁궐로 그 면적은 10만 1222㎡이다. 1988년부터 복원공사 중임. 1980년 9월 16일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흥화문(興化門) / 신문로 2가에 있는 경희궁 정문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경희궁지에 소재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이다.


일반적으로 궁궐의 정문은 2층으로 지어지는데, 경희궁은 임금이 가끔 머무르는 별궁인 까닭에 그 정문인 흥화
문도 간소하게 1층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건평은 약 88㎡이다. 1617(광해군 9)~1620년(광해군 12) 경희궁을 창건할 때 동향()으로 세워졌으며, 1915년 경희궁 남쪽으로 이건, 1932년 박문사()의 절문으로 사용되었고,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호텔의 정문으로 이용하였으나, 1994년 경희궁지에 복원되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 용두(), 잡상() 등이 갖추어져 있고, 천장은 연등천장, 우물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방(), 평방()을 둔 기둥 위에는 외2출목(), 내2출목()의 공포(栱  )를 구성하였다. 경희궁에 있던 1백여 채의 건물 가운데 숭정전(殿)·황학정()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 문뿐이어서, 경희궁의 건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617년(광해군 9) 인경궁()·자수궁()과 함께 건축을 시작하여 162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 자리는 원래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뒤에 으로 추존)의 잠저()였는데, 여기에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숭정전(殿)·융복전(殿)·집경당()·흥정당()·회상전(殿)·흥화문()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829년(순조 29)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831년에 중건하였다

그후 국권피탈 때에는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황학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숭정전은 1926년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되고,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로 이건하였으며, 흥화문은 1932년에 박문사()의 산문()으로 이축되었다가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은 1922년 사직단() 뒤 등과정() 터로 이건하였다.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하고,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