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7. 11:18ㆍ카테고리 없음
교황 프란치스코 1세
2013년 3월 17일 사순 제5주일 묵상
율법학자들은 단죄해야 한다고 시끌시끌한데, 예수님께선 말없이 땅바닥에 뭘 쓰십니다. 그러더니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너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시며 간음죄로 잡혀온 여자를 그냥 보내주십니다.
...
단죄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 문을 닫아걸지 말고,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다른 가능성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고 포옹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에 최대한 우리를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조차도 두려워말고, 내 마음 문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지혜와 성령의 움직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죄하지 말라는 것은 또한 드러난 행위 뒤의 배경이나 구조적 문제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근원과 뿌리도 함께 살피라는 것입니다.
새 교황님이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택했습니다. 이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환호하고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교회가 중세 이래 가장 타락하고 가장 둔감한 시기에 처해있음을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사랑과 우애, 겸손과 섬김, 단순함과 소박함, 자연과의 친밀함.., 이런 것들을 교도권에서도 느껴볼 수 있기를 참으로 갈망해왔기 때문 아닐까요.
프란치스코 1세 교황님의 첫 미사 강론의 한 대목입니다.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는 새 교황님의 이끄심 속에서 우리 교회가 다시금, 교회의 근본인 겸손과 청빈 영성을 회복하는 기회의 배에 과감하게 올라서길 바랍니다. 단지 마음만이 아니라 행위와 구조로서도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갈수록 잊고 있는 십자가 영성이고, 삶으로 증거 해야 할 구원 영성입니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남미 브라질의 저명한 신학자요 영성가입니다. 그는 가톨릭 교회를 지극히 사랑한 사제였으나, 그 교회로부터 단죄 받고 결국 교회를 떠난 분입니다. 프란치스코회 소속 사제이던 시절에 쓴 저서에서 보프는,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예언적 전통과 역사를 열린 자세로 인정하고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예언적 운동으로 "청빈과 봉사와 모든 영예와 사치를 거부하는 복음주의적 차원, 그리고 소외받은 사람들 가운데로의 투신을 다시 받아들여 온 운동"입니다.
예수회 소속 남미 대륙 추기경님께서 교황에 선출되셨다는 소식에, 강정 마을 우리 예수회 신부님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편에 서서, 또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예수회 수도자들, 특히 강정의 우리 신부님들에게 새 교황님은 더 큰 용기와 지지, 연대의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강정 예수회 신부님들은 기운 빠지고 포기하게 될까요?
새 교황님에 대한 기대가 열렬합니다. 속단도 지나친 기대도 금물입니다. 이는 실망과 좌절을 예비하고, 단죄와 심판을 준비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단죄는 내 뜻과 욕심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기대하기를 중단해야 합니다. 내 기대치에 안 미친다고 쉽게 비난하고 화내며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틀에 들어오게 만들기를 단념하고,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에 묵상주제로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다만 감사하고 축하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결정적 시기마다 우리를 더 선하고 더 괜찮은 지점으로 새롭게 인도하고 계심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원 뜻과 그 현장 한 가운데로, 우리를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계심을 지금 기쁘게 목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새 교황께서 선출되셨다는 소식보다 더 감동적인 사건은, 역사상 최초로 군종사제직을 거부당한 우리 세 명 신부님들 이야기였음을 고백합니다.
생명과 평화, 겸손과 섬김의 교회.
프란치스코 1세 교황님과 함께 이 여정을 감사히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허나,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결코 실망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몫을 제가 계속 택할 수 있도록 의식이 흐려지지 않게 해주십사 간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