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수군 해전 정리

2023. 6. 20. 16:13아름다운세상

1. 옥포해전 (1592. 5. 7) 

옥포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첫 번째 해전이었다. 장군은 부산포 근처에 먼저 탐망선을 보내어서 살피게 하였다. 장군은 일본 함대의 규모와 전투방식을 알아내기 전까지 출전하지 않았다. 5월 7일에 그는 원균의 함대와 함께 출발하여 옥포로 향하였다. 일본 함대는 배에서 내려서 옥포 근처에 있는 마을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조선 함대를 발견하자 바로 배에 탑승하였다. 장군은 일본군들이 모두 탑승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포사격을 명하였다. 장군의 함대는 배를 한 줄로 만드는 일자진을 취하고 있었다. 장군은 그 당시 매우 흔한 전법인 적의 배에 올라타는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배들에 함포 사격만 하도록 명하였고 일본 함대를 거의 다 파괴하였다. 옥포해전의 승리는 개전 이래 조선이 이룬 첫 승리였다.

 

2. 합포해전 (1592. 5. 7)

옥포해전 후에 이순신 장군은 거제도에 있는 영등포에 정박할 예정이었으나 탐망선이 일본 배들이 오늘날의 진해인 합포를 지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군은 즉시 함대를 그쪽으로 향하여 일본 배를 쫓았고 공격을 하였다. 일본인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 조선 함대는 모든 배를 파괴한 다음에 창원에 있는 남포로 향하였다.

 

3. 적진포해전 (1592. 5. 8)

새벽에 이순신 장군은 일본 함대가 진해의 고리량에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군은 즉시 출정하여서 일본 함대를 뒤쫓았다. 장군은 고성에 있는 적진포에서 13척의 일본 선박을 발견하였다. 일본인들은 승선할 시간이 없어서 육지에서 조총으로 공격을 해왔다. 장군의 함대는 일본군을 활로 공격하였고 모든 배를 파괴하였다. 이 전투 이후 장군은 5월 9일에 본영이 있는 여수로 돌아갔다.

 

4. 사천포해전 (1592. 5. 29)

본영으로 돌아온 뒤로 이순신 장군은 5월 27일까지 함대 전법을 훈련하거나 수군의 훈련에 주력하였다. 장군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다음 해전에서의 전법을 의논하여서 전라좌수영과 연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장군은 좌수영에 전갈을 보내서 6월 3일에 만나기로 하였다. 5월 27일에 원균이 전갈을 보내왔는데, 그의 함대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여 이순신 장군은 좌수영과 함대를 합하지 못하고 5월 29일에 단독으로 출전하였다.

 

장군은 원균의 함대와 만난 후에, 일본 함대를 뒤쫓아서 사천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군은 사천포 앞 바다가 좁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기 때문에 배를 일렬로 늘어 뜨리는 장사진을 펼치라고 명하고, 그대로 사천포로 향하였다. 일본 함대를 항구에서 유인해 내려고 하였으나 약 200여명의 일본군은 항구에서 조총으로 사격을 할 뿐이었다. 그때, 조수가 바끼자 장군의 함대는 항에 근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장군은 거북선을 최초로 내세우게 된다. 거북선은 함대가 진입하기 전에 먼저 돌격하여서 일본 배들을 흩뜨려 놓았다. 곧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장군은 남은 모든 배들을 침몰시켰다. 장군은 이 해전에서 왼쪽 어깨에 조총을 맞아서 부상을 당하였다.

 

5. 당포해전 (1592. 6. 2)

이순신 장군은 함대를 움직여 6월 1일에 고성의 사량도에 정박하였다. 다음날, 오전 8시경에 장군은 당포에 일본군 함대가 정박중이라는 탐망선의 제보를 듣고 이곳을 떠나서 당포로 향하였다. 장군은 오전 10시경에 당포에 도착하여서 일본 함선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배위에서 또한 육지에서 대항 사격을 해왔다. 장군은 거북선을 보내 먼저 돌격토록 하였고, 일본 함대 대장선인 아다케를 먼저 공격하여 격침하도록 하였다. 곧 장군의 휘하 장수인 권 준이 일본 대장인 가메이 코레노리를 죽였다. 장군의 함대는 대장이 죽자 혼란에 빠진 일본 군들을 차례로 죽였다. 장군의 함대가 일본군의 모든 배를 침몰시키고 승리를 확정지었을 즈음에 탐망선으로부터 일본군 함대가 거제도로부터 항진해 오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하여,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이 일본 함대를 쫓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6. 1차 당항포 해전 (1592. 6. 5)

전라좌수영이 6월 4일에 이순신 장군의 함대와 만나 연합함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 함대의 전력은 두 배로 전격 확장되었다. 한 시민이 고성지방의 당항포에 일본 함대가 정박하고 있다고 신고를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장군들과 협의를 하여서 일본 함대를 당항포에서 유인해 내기로 하였다. 조선 함대는 두 개의 분대를 구성하여 첫 번째 분대가 먼저 당항포로 향하였다. 두 번째 분대는 첫 번째 분대가 항구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내올 때 까지 대기 하였다가 공격에 나섰다. 이 해전에서도 거북선은 먼저 돌진하여서 대장선인 아다케선을 먼저 침몰시켰고 모든 일본 함선을 침몰시켰다.

 

7. 율포해전 (1592. 6. 7)

연합함대는 새벽 즈음에 출발하여 증도에 도착하였다. 이 근처에서 조선 함대는 일본 함대의 흔적을 찾고자 노력하다가 정오 즈음에 영등포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소 규모의 일본 함대를 발견하여 뒤쫓았다. 이 해전에서 패하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이 해전 이후 일본군 대장이었던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근처 육지에 상륙한 후 자살하였다고 한다. 연합함대는 6월 10일에 흩어져서 각각의 군영으로 향하였다.

 

8. 한산도해전 (1592. 7. 8)

일본의 통치자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게 전령을 내려 수군끼리 연합하여서 조선 함대에 맞서라 명하였다. 하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혼자서 출전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7일 와키사카는 일본 함대를 이끌고 당시 일본 수군의 총사령부가 있었던 진해를 떠났다. 와키자카의 함대는 거제도 부근에 도착하여 견내량에 정박하였다. 정박하고 있던 일본 함대를 본 양치기가 이를 조선 함대에 알렸다. 조선 함대는 일본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견내량 앞바다가 좁아서 판옥선의 진행방향을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전투 중간에 수세에 밀리면 육지로 도망갈 공산이 컸다.

대 여섯척으로 구성된 분대는 견내량으로 향했고, 나머지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기다렸다. 분대는 일본 함대를 공격하다가 퇴각하는 것처럼 하여 일본 함대를 유인해 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장군의 가장 유명한 전법중 하나인 ‘학익진’을 펼치도록 명령하였다. 조선 함대는 학익진을 취한 후 즉시 포문을 열어 공격했으며, 첫 공격으로 인해 2~3척의 일본 전선이 순식간에 침몰되었다. 조선 함대는 여세를 몰아, 일본 함대의 대장선에 공격을 집중하면서 일본 함대를 둘러싸고 공격을 펼쳤다. 전투가 수세에 몰리자, 일본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14척의 배를 몰고 퇴각하였다.

 

9. 안골포해전 (1592. 7. 10)

조선함대가 견내량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7월 9일에 탐망선으로부터 일본 함대 40여척이 안골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당시, 안골포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함대는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야키의 연합함대였다. 두 일본 장수는 7월 7일에 와키사카 함대를 따라 출전 했던 참이었다. 7월 10일에 조선 함대는 안골포로 향하였다. 조선함대는 포구앞바다의 수위가 낮아서 판옥선이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 함대를 유인해 내려 했다. 그러나, 일본 함대는 포구에서 나오지 않고 땅에서 대응사격을 해왔다. 이순신 장군은 분대를 보내어서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배들을 함포 공격으로 침몰시켰다. 많은 일본군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육지로 도망하였다. 일본 함대의 절반 정도 배가 격침된 후에 조선 함대는 주변 산에 숨어 있던 평민들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전장을 떠났다. 이순신 장군은의 함대는 7월 13일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10. 장림포 (1592. 8. 29)

이순신 장군은 전투가 없는 기간 동안 전선을 건조하고 전라좌수영과 함께 전법훈련을 하였다. 전라연합함대는 경상좌수영측으로부터 일본함대가 김해로부터 출항하여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8월 24일에 출전하였다. 전라연합함대는 부산 쪽으로 향하면서 일본전선을 8월 28일까지 탐색하였다. 8월 29일에 이르러, 일본 전선을 동래에 있는 장림포에서 발견하고 모두 격침하였다.

 

11. 부산포 (1592. 9. 1)

절영도에서의 전투 후에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로 탐망선을 보내었다. 탐망선은 470여척이 부산포에 정박중인 것을 발견하고 조선 함대로 돌아왔다. 조선 함대는 부산포로 향하여 먼저 일본 전선 4척을 격침하고, 장사진을 피고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일본 육군도 일본 함대에 합류하여 주변 언덕에서 조선 함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선 함대는 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전선을 고치고 군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9월 2일에 본영에 도착하였다.

 

12. 2차 당항포해전 (1594. 3. 4~5)

이순신 장군은 탐망선이 일본함대가 오리량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후, 함대를 움직여 증도로 향하였다. 장군은 함대를 둘로 나누었다. 어영담이 30여척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편대를 이끌고 일본 전선 30척을 공격하는 동안, 이순신 장군의 편대는 증도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어영담의 편대는 당항포 앞바다에서 30척의 일본 전선을 격침하였다. 장군은 5월 7일에 본영에 도착하였다.

 

13.명량해전 (1597. 9. 16)

1597년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전투에서 대패하고, 전투 후에 죽었다. 약 160여척에 달했던 조선 함대의 전선은 칠천량전투를 치르면서 거의 모두 격침되었다. 전투 중에 배설장군은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장을 빠져나왔다. 칠천량전투에서의 패배 이후에 조선 조정은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와 수군들을 모아서 남하하였다. 8월 19일에 장군은 배설장군이 이끌고 나왔던 전선들을 회령포에서 인수하였고 군량미, 화살, 활 등을 모았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으로 싸우지 말고 육군으로 싸우라 하였으나, 장군은 그의 유명한 말인,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전선이 남아있나이다”을 담아 선조에게 보내었다. 이순신 장군은 계속해서 수군의 기지를 서쪽으로 움직여갔다.

 

9월 16일에 탐망선이 수많은 일본 전선이 수군 본영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를 하였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오늘날 해남군에 있는 수군 본영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기다렸다. 133척의 일본 전선이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다인 울돌목으로 들어왔다. 울돌목의 가장 낮은 수위는 약 1.9m이고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5노트이다. 일본군들은 전선을 분리하여 울돌목으로 들어올 수 없는 아다케선은 앞에서 대기하였다. 133척의 비교적 아다케선보다 적은 전선들만 울돌목을 통과하여 조선함대에 공격을 해왔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배를 일자로 편성하는 일자진을 펴도록 명령하였다. 개전 이후, 다른 장수들이 공격을 머뭇거리고 있자, 이순신 장군의 배가 선두에 서서 공격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다른 전선에게도 공격을 명하고 일본 함대로 돌진하였다. 곧 조류가 바뀌자 남아있던 조선 함대의 전선들도 이순신 장군을 따라 공격하였다. 순식간에 31척의 일본 함선이 파괴되었고 일본군은 해질녘에 퇴각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대응한 덕분에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14. 노량해전 (1598. 11. 19)

명량해전 이후에 일본 함대는 이순신 장군의 수군 본영에서 먼 곳인 웅천으로 퇴각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 전선, 군량, 무기를 모아서 수군 본영을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였다. 1598년 2월 17일에 장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군으로부터 앞바다를 지키고 수군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 고금도에 통제영을 세웠다. 고금도에 통제영을 세운 이후 장군은 다음 해전을 위한 군량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는 고금도에 평지가 많아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 알려지자 많은 난민들이 이 섬으로 몰려 들었다. 장군은 이들과 함께 수군을 재정비 할 수 있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8천여명의 난민을 훈련시켰다고 하며 이에 따른 군량미 걱정을 하였다고 한다.

 

명 함대는 이순신 장군의 함대와 7월 16일에 연합하였다. 이후, 조선명연합함대는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었다. 8월 18일에, 토요토미가 죽은 이후 일본 조정은 조선에 있던 일본군에게 11월까지 퇴각할 것을 명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퇴각하려 하였으나, 조선명연합함대에 길목이 막혀서 실패하였다.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배를 다른 일본군 진영에 보내었다. 이순신 장군의 장수들이 이를 알고 장군에게 알렸다. 장군은 휘하 장수들과 회의를 열고 노량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8일에 장군의 함대는 노량앞바다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에 응하여 출전한 시마즈의 함대를 기다렸다. 진린의 함대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여 이순신 장군의 함대와 연합하였다.

 

당시 바람이 북서쪽으로부터 불어오고 있었고 조선명연합함대는 이에 따른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명연합함대는 일본 함대를 함포로 공격하였다. 곧 일본 전선들은 불에 휩싸여 퇴각하였다. 퇴각하다가 일본 함대는 포구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일본군은 포구에서 벗어나고자 격렬하게 항전하였다. 전투 중반에 이순신 장군은 총상으로 인해 관음포 포구 주변에서 장군의 아들인 이회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장군은 죽기 전에 장군의 명언 중 하나인,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